터키는 험난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사이에서 미묘한 타협점을 찾아온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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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KOWIN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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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를 가진 집단은 항상 조심해야 해요”
터키는 험난한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 사이에서 미묘한 타협점을 찾아온 나라다. 터키 의회, 언론사, 지방정부 등을 두루 다니며 ‘문명 교차로’의 속살을 들여다봤다.

터키는 묘하게 뒤섞인 나라다. 국토 대부분이 아시아에 속하지만 정작 경제와 문화의 핵심 기능은 유럽에 몰려 있는 나라.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세속주의가 헌법에 박혀 있는 나라. ‘문명의 교차로’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이슬람주의와 세속주의라는 두 큰 줄기가 어지럽게 교차하며 터키를 직조해낸다.

오스만 제국을 이어받은 터키는 21세기에 다시금 떠오르는 국가다. 연평균 7%대의 고도성장을 이어가고 있고, 평균연령이 30세에 불과한 젊은 나라다. 세속주의와 서구화를 추구하던 시절 이슬람권의 ‘왕따’였지만, 이슬람계 정당이 집권하면서부터는 세속주의와 이슬람 지도국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쫓고 있다.

<시사IN>은 올해로 3회를 맞이하는 한국·터키 민주화 워크숍을 3월17일부터 24일까지 동행 취재했다. 민주당 최재천 의원이 이스탄불 문화원과 함께 개인 자격으로 추진하는 민간 교류 행사다. 2011년 1회 워크숍을 터키에서, 지난해 2회 워크숍을 한국에서 진행했다.

3회째인 올해 다시 터키를 찾았다. 민주당 최재천·부좌현·이언주·홍의락 의원, 학계에서 김태일(정치학)·오동석(헌법학)·이근(국제정치학)·장덕진(사회학) 교수, 비정부기구에서 장주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이 함께했다. 의회, 헌법재판소, 개헌위원회, 지방정부, 언론사, 시민단체, 학교, 일반 가정 등을 두루 돌아봤다.

 “무기를 가진 집단은 언제나 조심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너무 낙관적이에요.”

방문 사흘째인 3월19일, 이스탄불의 슐레이만샤흐 대학 워크숍이 끝난 후, 이 대학 하스멧 괴키르막 교수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 측 방문단이 내놓은 ‘한국에서는 군사 쿠데타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라는 요지의 발표를 들은 감상이다. 터키의 민주화 세력에게 군사 쿠데타는 현존하는 위협이다.

반대편에서는, 터키에서 가장 신뢰하는 조직으로 기꺼이 군을 꼽는 정서 역시 만만치 않다. 터키에서 군이 세속주의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터키공화국 국부로 추앙받는 전쟁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제국이 강한 종교색 때문에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패망했다고 생각했다.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히잡(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두건)이 금지됐다. 터키는 헌법에 세속주의를 못 박은 나라가 되었다. ‘인구의 99%가 무슬림이지만 정체성은 세속주의’인 독특한 나라는 그렇게 탄생했다.

아타튀르크의 뜻을 계승하는 군부는 단호한 세속주의 수호 블록이 되었다. 여기에 사법부·관료·학자 그룹이 결합했다. 이 세속주의 엘리트 동맹이 1923년 건국부터 2002년 총선까지 80년 동안 터키를 통치했다. 주로 선거를 통해서였지만, 여차하면 군이 직접 나섰다. 쿠데타 세 번(1960·1971·1980년)과 유사 쿠데타(1997년) 한 번이 있었다.

특히 1997년에 일어난 유사 쿠데타는, 터키 최초의 이슬람계 집권당(1995년 집권)인 복지당에 맞선 세속주의 엘리트 동맹의 총궐기였다. 군부는 헌법재판소를 압박했고, 헌재는 세속주의 헌법을 어겼다며 1998년 1월 집권 복지당을 해산했다.

이슬람계 민주화 블록은 5년 만에 역습에 성공했다. 2002년 총선에서 온건 이슬람계 신생 정당인 정의개발당이 집권하면서, 세속주의 기득권은 헌정사에서 가장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정의개발당은 세 번 총선에서 모두 이겨 지금도 집권하고 있다. 복지당 출신의 에르도안 총리가 최고 권력자다.

싸움은 진행 중이다. 2008년 세속주의 세력은 1997년의 전례대로 정의개발당 해산 청원을 헌법재판소에 낸다. 곧이어 군의 쿠데타 미수 사건(에르게네콘)이 터져 군 장성이 줄줄이 잡혀 들어간다. 민주화 세력에서는 에르게네콘을 ‘끝나지 않은 군의 쿠데타 음모’의 대표 사례로 든다. 반면 세속주의 세력에서는 ‘이슬람계 집권 세력의 세속주의 말살 음모’라고 달리 규정한다.

터키 헌정사가 한국과 닮아 보이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여기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전제하곤 하는 ‘전통주의 보수파 대 자유주의 저항세력’ 구도가 터키에서는 정반대다. 반민주 기득권 블록은 서구화를 지향하는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고, 이에 맞서는 민주화 세력은 이슬람 색이 강한 문화적 보수주의에 발 딛고 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보수, 정치적으로 진보를 지향합니다.”

방문 이틀째인 3월18일, 터키 최대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신문 <자만(Zaman)>의 블렌트 케네슈 편집장은 방문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치적으로는 민주화를, 문화적으로는 이슬람 전통 가치를 지지한다는 의미다. 자만은 터키의 풀뿌리 이슬람 운동에 힘입어 급성장한 언론사다.  

자만의 여기자들은 대부분 히잡을 썼다. 어느 사회에서건 언론은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게 보통이지만, 자만의 여기자들은 일반 터키 여성보다도 히잡을 쓴 비율이 높아 보였다.

관찰자들은 터키가 이슬람화하는 징후로 히잡의 증가를 든다. 한때 공공장소에서 금지되던 히잡은 이슬람 정당 집권 12년 동안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손꼽히는 터키 전문가인 이희철 터키 대사관 참사관의 평은 조금 다르다. “이슬람 신앙의 의미도 있지만, 히잡을 금지했던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 표시이기도 하다. 히잡은 종교적인 동시에 정치적인 상징이다.” 다시 한번, 이슬람과 민주화가 만난다.

세속주의가 상층 권력을 장악한 80년 동안, 이슬람 운동은 수면 아래에서 터키 사회의 풀뿌리를 다져 나갔다.

페툴라 귈렌이라는 존경받는 이슬람 지도자의 인도로 시작된 자선·기부·봉사 운동인 ‘히즈멧 운동’은, 터키 전역에 1000여 개 초·중·고·대학교와 그보다 많은 입시학원과 공부방을 세울 정도로 성장했다. 터키 학생 중 꽤 많은 수가 학창 시절에 한 번 이상은 히즈멧 교육기관을 거치는 셈이다. 해외에도 비슷한 수의 학교를 지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킴세욕무’라는 국제 모금회는 오직 기부금만으로 연간 1000억원 규모의 자선활동을 펼친다. 역시 절반 정도는 해외에 쓴다.

히즈멧으로 대표되는 풀뿌리 이슬람 운동은 학교, 경찰, 하급 관료, 언론, 시민사회 등을 거점으로 차츰 세력을 넓혀갔다. 이희철 참사관은 “수면 아래에서 이런 흐름들이 확산되다가, 2002년 총선을 계기로 한 방에 폭발해 전세를 뒤집은 것이다. 2002년 이후의 터키는 ‘뉴 터키’, 사실상 혁명에 가깝다”라고 평했다.

 “결국 터키 민주화가 이슬람 신정국가로 미끄러져 가는 길은 아닌가.”

일정 셋째 날인 3월19일, 히즈멧 운동의 거점이자 터키 최대 시민단체인 ‘기자 작가 재단’과의 토론에서, 민변 장주영 회장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우리에게 낯선 ‘이슬람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 모델’을 지켜보면서, 방문단의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던 질문이다. 인구의 99%가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가 과연 정교분리와 세속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까?

엿새째인 3월22일, 방문단은 터키의 지방정부 중 하나인 부르사의 도지사 샤하벳틴 하르풋과 만났다. 중앙정부, 즉 이슬람계 집권당이 임명한 사람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를 인용하면서, “행복은 영혼의 문제이므로 종교와 신앙적 자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금기로 취급받았다던 공직자의 종교 발언이 이제는 거침없었다.

터키 민주화의 종착역을 두고는 관측자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특히 서구의 시선이 냉소적이다. 2011년 총선을 며칠 앞두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노골적으로 이슬람 집권당에 반대하는 기사를 썼다. 국제경제 이론가인 대니 로드릭 하버드 대학 교수는 2011년 총선 이후 칼럼에서 “터키가 권위주의로 돌진하고 있다”라고 썼다. 에르도안 현 총리는 현지에서 ‘최후의 술탄’이라는 별명도 있다. 총리는 헌법 개정을 추진 중인데, 현재의 총리·대통령 분권제를 대통령 1인 체제로 바꿔 대통령이 되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다.

하지만 터키의 종착역이 권위주의 신정국가라는 관측은 서구의 시선일 뿐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근거는 이렇다. 우선은 80년을 지속해온 세속주의의 경험이 있다. 이슬람권에서 예외적으로 서구화를 오래 경험해온 터키 유권자가 신정국가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다는 지적이다.

둘째, 동쪽으로 이웃한 ‘반면교사’ 이란이 있다. 한국 반공세력이 위기 때마다 북한을 들먹이듯, 터키의 세속주의 기득권 세력은 이슬람·민주주의 동맹의 공세가 있을 때마다 “잘못하면 터키가 이란처럼 신정국가가 된다”라고 역공을 펴곤 했다. 마치 우리의 ‘레드 콤플렉스’처럼 신정국가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이다. 방문단과 토론에 나선 ‘기자 작가 재단’ 흐루말리 사무총장은 신정국가의 가능성을 질문받자 곧바로 “우리는 터키를 이란으로 만들자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셋째, 정의개발당이 집권한 후 연평균 7%대의 고도성장을 기록하면서 새로운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터키에서 ‘아나톨리안 타이거스’(기득권인 유럽 쪽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등장한 신흥세력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신중산층은 이슬람과 더불어 집권당의 양대 지지 기반이다. 이 신중산층은 세속주의 기득권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세속주의 자체를 흔드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정의개발당이 이슬람화를 밀어붙이려면 지지 기반 이탈을 각오해야 한다.

“다시는 다보스 포럼에 오지 않겠다.”

이 한마디로 에르도안 총리는 이슬람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2009년 1월 에르도안 총리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맹비난한다. 사회자가 시간을 넘겼다며 발언을 제지하자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중도 퇴장해버렸다. 이 카리스마형 지도자에 이슬람 세계는 열광했다.

이전의 터키는 강력한 세속주의 기조 때문에 이슬람 세계에서 고립된 국가였다. 터키의 눈은 오로지 유럽에 가 있었다. 하지만 이슬람계 정당 집권 이후 터키는 아랍, 중앙아시아 등 이슬람권과의 외교 행보를 넓혀가고 있다.

또한 집권 정의개발당은 터키의 오랜 숙원인 유럽연합(EU) 가입 문제를 두고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수완을 보여주었다. EU가 요구하는 가입 조건 중 ‘군부의 정치개입 차단’ 등 민주화 이슈를 활용하여 군부를 견제했다. 소모적인 정면충돌 대신 EU에 기대어 효과적으로 군부의 힘을 뺀 것이다. 터키 국내 정치만 보면 ‘EU·이슬람 동맹’이라고 부를 만한 기묘한 동맹이 생겼다. 터키의 이슬람은 외교 영역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와는 결이 다른, 일종의 실용주의 색을 띤다. 에르도안 총리 자신도 한때 강경 이슬람주의자로 EU 가입을 반대했지만 지금은 태도를 바꿨다.

아랍 민주화의 물결 이후 이슬람 문명권에는 ‘서구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모델을 찾는 국가가 많다. 방문단에 동행한 서울대 이근 교수(국제대학원)는 “미국 처지에서도, 서방과 대화가 되면서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참고해 받아들일 만한, 이스라엘과 잘 지낼 수 있는 이슬람 민주주의 국가 모델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터키는 유력한 후보 국가다.

군부로 대표되는 세속주의 기득권의 퇴조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집권 정의개발당은 신중산층과 이슬람 연합이라는 강력한 다수파 연합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2년 만에 다시 터키를 찾은 최재천 의원도 터키 사회의 변화를 느낀다. “군부의 성지인 아타튀르크 기념관을 다시 갔는데, 겨우 2년 사이에 기념관을 안내하는 군의 ‘군기’가 확 빠져 있더라. 위압적이지 않고 나긋나긋하다. 터키 사회가 군에서 민간으로 힘이 넘어가고 있다는 상징으로 느꼈다.”

터키는 여전히 세속주의 국가다. 이슬람·민주화 세력도 터키 세속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기존 기득권이 세속주의를 빙자해 종교를 탄압했다며 ‘울트라 세속주의’로 구분해 부른다. 서구의 눈은 여전히 냉소적이지만, 터키는 이슬람과 세속주의 사이에서 지금까지는 균형을 잃지 않고 민주화하고 있다는 평이 많다.

사진설명
1. 제3회 한국·터키 민주화 워크숍에서 최재천 의원(왼쪽 세 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2. 터키의 에르도안 총리가 2009년 1월 다보스 포럼에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을 비난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있다.

원문 기사: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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